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함평 모씨 (문단 편집) === 행적 === > {{{+3 충정공(忠正公) 모경(牟慶) 대장군}}} > > 1100년 병부상서 > 1100년 호북경서선무사 > 1126년 이부상서 > 1126년 대사마대장군 > 1126년 고려 협상 사절단 단장 > 1126년 이자겸의 난 일등공신 > 1126년 추충분의 익대좌명공신 > 1128년 전라도 함평군수 [[중국]] [[북송]] 6대 신종(1068~1085 재위)대에 옹주 홍농군(雍州 弘農郡,지금의 河南省 三門峽 남쪽)에서 출생(추정)하여 서기 1100년(북송 7대 휘종, 고려 철종15년) '''병부상서''' 겸 '''호북경서선무사'''에 임명되어, 금군이 남침해 왔을 때 3만 군대로써 애산(崖山)에서 격퇴하고 1126년7월 (북송 9대 흠종 원년, 고려 17대 인종 4년)에 '''이부상서''' 겸 '''대사마대장군'''에 임명된 후 [[고려]]에 '''협상사절단(協商 使節團)의 단장'''으로 파견되었다. 협상안건은 북쪽의 금나라([[금태조]] 완안아골타가 1115년 건국하여 국호를 '金'이라 함)가 북송을 공략하고 있으니 [[고려]]가 지원군 파견을 요청하였으나 [[고려]]의 입장은 불과 몇 달전에 [[이자겸]]이 난을 일으켜 어린 왕(인종)을 잡아가두는 사태까지 있어서 국내사정상 외국에 지원군 파견 불가하다 하여서[* 그해 3월에 [[이자겸의 난]] 발생 → 5월에 [[척준경]] 등이 진압함.] 그 결과 북송의 협상 사절단(協商 使節團)은 [[고려]]의 국내사정을 이해하여 더 이상 요청을 하지 못한 채 귀국. 이때 牟공은 고려의 충신 [[정지상]]을 도와 [[이자겸의 난]] 수습에 협력해 준 공로로, 고려 정부로부터 '''추충분의 익대좌명공신'''이란 공적을 부여받고 귀국했다. 1126년 10월부터 1127년 4월까지 金나라의 대대적인 남침공격으로 북송의 수도 동경개봉부(지금의 하남성 開封)가 함락되고, 투항파(진회秦檜 등)들의 모함으로 牟공과 악비(岳飛) 장군 등이 투옥되었다. 이때 수도에 입성한 金군들은 온갖 노략질을 다한 후 [[북송]]의 휘종, 흠종 등 두 황제와 문무백관 3,000여명을 포로로 잡아 金나라의 오국성(五國城) 인근에 감금하였다. 중국 역사에서는 이를 “[[정강의 변]]” 이라고 하였다. 1127년 5월 (남송 고종 원년, 고려 인종 5년) 흠종의 동생이 중국 남쪽으로 피신하여 <남송>을 건국하고, 재상 이강의 탄원으로 牟공과 악비(岳飛)장군을 석방하게 된다. 1128년6월 (남송 고종 2년, 고려 17대 인종 6년) : 牟공이 [[고려]]에 협상 사절단으로 두 번째 파견된다. 이때 사절단은 [[고려]]의 동해를 따라 金나라에 몰래 잠입하여 오국성에 유배중인 북송의 두 황제(휘종, 흠종)를 비밀리에 구출해 오고자 하오니 [[고려]]의 협조 요구하였으나 [[고려]]는 이미 金나라의 강요로 형제관계를 맺었고 만약 이런 공동의 비밀작전이 金나라에 발각되는 날이면 金나라는 [[고려]]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었다. 따라서 국익상 남송의 요청을 들어줄 수가 없다고 하여 사절단은 사뭇 못마땅한 기색으로 마지못해 귀국하였으나, 牟공은 귀국을 포기한 채 [[고려]]에 남아 귀화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인종]]은, 2년전 [[이자겸의 난]] 때 협조해 준 牟공의 공로 등을 감안하여, [[전라도]] '''함평군수'''의 직위와 함께 공주를 牟공의 배필로 삼아 정착토록 하였다. 1143년 (인종21년) 숙환으로 별세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